몽펠르랭 소사이어티 — 자유주의의 지적 반격이 시작된 곳
1. 시대 배경: 1947년, 자유주의의 최암흑기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2년도 되지 않은 시점이다. 유럽은 수천만 명의 사망자, 부상자, 기아 상태에 놓여 있었다. 전후 유럽의 지적 분위기는 압도적으로 집단주의 쪽이었다. 영국에서는 노동당이 집권하여 주요 산업의 국유화를 추진하고 있었고, 케인즈주의적 계획경제가 주류 경제학을 지배하고 있었다. 프랑스, 이탈리아도 사회주의 정당이 강세였다. 소련은 동유럽 전체를 위성국으로 만들어가고 있었다.
국가 권력의 팽창과 마르크스주의 또는 케인즈주의적 계획경제가 전 세계를 휩쓸고 있던 시기였다. 고전적 자유주의를 진지하게 옹호하는 학자는 각국에 소수만 흩어져 있었고, 서로 고립되어 있었다.
하이에크 자신은 1944년 《노예의 길》을 출판해 사회주의와 파시즘이 공유하는 집단주의적 근원을 폭로했지만, 학계에서의 반응은 냉담했다. 런던정경대(LSE)에서도, 이후 옮긴 시카고 대학에서도 그의 입장은 소수파였다. 경제학과가 아니라 “사회사상위원회”라는 별도의 학제간 프로그램에 자리를 얻었을 정도다.
2. 창설: 스위스 산 위의 10일
1947년 4월, 하이에크는 39명의 경제학자, 역사학자, 기타 지식인들을 스위스 레만 호수가의 몽펠르랭이라는 마을로 초청했다. 장소는 Hotel du Parc였다. 회의 자금은 윌리엄 볼커 펀드, 영란은행, 경제교육재단(FEE), 그리고 회의 총비용 18,062 스위스 프랑의 93%를 부담한 스위스 크레디트 은행(현 크레디트 스위스)에서 나왔다.
원래 이름은 “액턴-토크빌 소사이어티”로 하려 했다. 자유주의 전통의 두 거인 이름을 딴 것이다. 그런데 프랭크 나이트가 “두 로마 가톨릭 귀족” 이름을 붙이는 것에 반대했고, 결국 회의 장소의 지명을 따서 몽펠르랭 소사이어티가 되었다.
10일간의 회의에서 다룬 주제는 광범위했다. 하이에크는 자유 기업과 경쟁적 질서, 독일 문제, 역사 교육에서의 자유주의 역할 등을 직접 세션으로 조직했다. 나머지 세션은 다른 참석자들이 구성했는데, “자유주의와 기독교”라는 세션도 있었다. 유럽에서 기독교 사회교리와 자유주의가 대립한다는 통념이 있었는데, 하이에크는 이것이 역사적 우연일 뿐이라고 보았다. 흥미롭게도 이 세션의 의장은 기독교에 적대적이기로 유명한 프랭크 나이트가 맡았다.
3. 참석자들: 20세기 자유주의 사상의 올스타
창립 회의 참석자 명단 자체가 하나의 지적 역사다.
하이에크, 카를 포퍼, 라이오넬 로빈스는 런던정경대에서, 밀턴 프리드먼, 에런 디렉터, 조지 스티글러는 시카고 대학에서, 레너드 리드와 F.A. 하퍼는 경제교육재단에서, 헨리 해즐릿은 뉴스위크에서, 루트비히 폰 미제스는 뉴욕대에서, 베르트랑 드 주브넬은 파리에서, 트뤼그베 호프는 오슬로에서 왔다. 여기에 독일 질서자유주의(Ordoliberalismus)의 대표 주자인 발터 오이켄도 있었다.
이후 이 조직에서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만 8명이 나왔다. 하이에크, 프리드먼, 스티글러, 제임스 뷰캐넌, 로널드 코스, 게리 베커, 버논 스미스 등이다.
4. 목적 선언문: “문명이 위험에 처해 있다”
1947년 4월 8일 채택된 목적 선언문(Statement of Aims)의 첫 문단은 거의 전시 선포문에 가깝다.
“지구 표면의 넓은 지역에서 인간의 존엄과 자유의 본질적 조건이 이미 사라졌으며, 다른 지역에서도 현재 정책 경향의 발전에 의해 끊임없는 위협 아래 놓여 있다.”
서구 문명의 가장 소중한 자산인 사상과 표현의 자유마저 위협받고 있다는 인식이었다. 하이에크의 희망은 사회주의를 논박하기 위해 고전적 자유주의의 이념을 재생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 “국제 정치철학 아카데미”를 만드는 것이었다. 핵심은 교육적 목적이었고, 직접적 정치 참여가 아니라 아이디어를 통해 정치 구조에 영향을 미치려 했다.
5. 내부 논쟁: 미제스 vs 나머지 전부
창립 회의가 지적으로 단조로운 합창은 아니었다. 하이에크는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도 세부사항에 대한 불일치와 토론을 적극 장려했다.
가장 극적인 긴장은 루트비히 폰 미제스와 나머지 참석자들 사이에 있었다. 참석자 대다수에게 과제는 시장경제의 기능을 심각하게 훼손하지 않으면서 제한적이고 절제된 개입주의 국가를 도입할 수 있는지를 찾는 것이었다. 즉 대부분은 어느 정도의 국가 역할을 수용하는 “온건한 자유주의”를 지향했다.
반면 미제스는 타협 없는 순수 자유방임을 주장했다. 미제스는 다른 회원들이 사회주의 비판자들의 반자유주의적 전제를 상당 부분 수용하고 있다고 지적했고, 한 번 이상 다른 회원들에게 사회주의적 경향을 품고 있다고 비난했다.
칼 포퍼도 한 세션에서 “미제스의 경제적 자유주의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을 수 있다”고 발언했다. 이 내부 긴장은 이후 소사이어티 역사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가 된다 — 자유주의 진영 내에서도 “국가 개입 제로”(미제스, 로스바드 노선)와 “제한적 국가 인정”(하이에크, 프리드먼 노선) 사이의 근본적 분기가 존재했다.
사회보장, 공교육, 경제개발, 금본위제, 강제 중재, 프리드먼의 부의 소득세 아이디어 등에 대한 실질적 논쟁이 소사이어티 내에서 계속되었다.
6. 조직 구조: 의도적 분산
몽펠르랭 소사이어티는 탈중심화된 조직이다. 사무실도, 유급 직원도, 웹사이트 외에는 중앙 조직도 없다. 모든 담론과 토론은 회의를 통해서만 이루어지며, 회의는 지역 위원회가 자체적으로 조직하고 자금을 조달한다.
1947년 이후 33회의 총회, 27회의 지역회의, 그리고 다수의 특별회의가 유럽, 중남미, 미국, 아시아, 호주, 아프리카에서 열렸다. 회원 가입은 배타적이며, 기존 회원의 추천이 필수다. 회원 수는 1947년 50명 이하에서 2007년 기준 50개국 이상 550명 이상으로 성장했다.
하이에크가 이 조직을 선전이나 홍보 기관이 아닌 순수 학술 공동체로 설계한 것은 의도적이었다. 사회주의의 지적 헤게모니에 대항하려면 같은 수준의 지적 엄밀성으로 맞서야 한다는 판단이었다.
7. 최대의 유산: 싱크탱크 생태계의 탄생
몽펠르랭 소사이어티의 가장 큰 역사적 유산은 소사이어티 자체가 아니라, 거기서 파생된 전 세계 싱크탱크 네트워크다. 이 이야기의 핵심 인물이 앤토니 피셔(Antony Fisher)다.
피셔는 영국의 부유한 사업가로, 이튼 스쿨과 케임브리지 트리니티 칼리지를 졸업했으며, 2차대전 때 영국 공군 전투기 조종사로 복무했다. 전후 그는 정치에 뛰어들려 했다. 그러나 하이에크가 그를 설득했다.
“정치는 잊어라. 정치인들은 그저 지배적인 여론을 따를 뿐이다. 사건을 바꾸고 싶으면 아이디어를 바꿔야 한다.”
이 한마디가 전 세계 싱크탱크 운동의 출발점이 된다.
피셔가 이후 세운 것들:
- 1955년 — 경제문제연구소(IEA, Institute of Economic Affairs), 런던. 이것이 대처리즘의 지적 기반이 된다.
- 1977년 — 맨해튼 연구소(Manhattan Institute), 뉴욕.
- 1979년 — 태평양연구소(Pacific Research Institute), 샌프란시스코. 이 시기 프리드먼과 같은 아파트 건물에 살았다.
- 1981년 — 아틀라스 경제연구재단(Atlas Economic Research Foundation). 이것이 결정적이다.
아틀라스 네트워크의 목표는, 전 아틀라스 총재 존 블런델의 표현을 빌리면, “세계를 자유시장 싱크탱크로 뒤덮는 것”이었다. 창설 이래 아틀라스는 전 세계 90개국 이상에서 약 475개 기관을 출범시키거나 육성했다. 피셔는 몽펠르랭 소사이어티의 지역 및 국제 모임을 활용하여 아틀라스 산하 기관들의 인력, 펀드레이저, 기부자를 발굴했다.
이 네트워크에 속하는 주요 싱크탱크들: 카토 연구소, 후버 연구소, 헤리티지 재단, 미국기업연구소(AEI), 프레이저 연구소, 리즌 재단, 애덤 스미스 연구소 등. 레이건의 1980년 대선 캠프에서 76명의 경제 자문 중 22명이 몽펠르랭 소사이어티 회원이었다.
8. 정책에 미친 실제 영향
소사이어티 자체는 정책을 직접 만들지 않는다. 그러나 그 회원들이 만든 아이디어가 직접 정책이 된 사례는 무수하다.
정책 직위에 진출한 주요 회원으로는 서독 총리 루트비히 에르하르트, 이탈리아 대통령 루이지 에이나우디, 미 연방준비제도 의장 아서 번스, 미 국무장관 조지 슐츠가 있다. 체코 대통령 바츨라프 클라우스, 에스토니아 총리 마르트 라르도 회원이었다. 에르하르트는 전후 서독의 “경제 기적”을 이끈 장본인이고, 클라우스와 라르는 동유럽 탈사회주의 전환의 핵심 인물이다.
밀턴 프리드먼의 통화주의가 레이건과 대처의 경제정책 기반이 된 것, 뷰캐넌의 공공선택론이 정부 실패에 대한 분석 프레임을 제공한 것, 코스의 거래비용 이론이 규제 완화 논거가 된 것 — 모두 이 네트워크에서 배양된 사상이다.
9. 하이에크 프레임으로 재해석
앞서 논의한 하이에크의 진단으로 돌아가면, 몽펠르랭 소사이어티의 의미가 더 선명해진다.
하이에크는 자유주의가 패배하는 이유를 “비전의 부재”로 진단했다. 그리고 그 진단을 내린 당사자가 직접 처방을 실행한 것이다. 사회주의자들이 페이비언 협회를 통해 수십 년간 해온 것 — 지식인 네트워크를 조직하고, 아이디어를 체계적으로 생산하고, 그것을 교육과 정책으로 전달하는 파이프라인을 구축하는 것 — 을 자유주의 진영에서 처음으로 의도적으로 복제한 것이다.
옥스퍼드의 R.M. 하트웰은 영국의 페이비언 협회를 몽펠르랭 소사이어티의 대응물로 지적했다. 1884년 설립된 페이비언 협회는 노골적 마르크스주의를 거부하면서도, 부드러운 사회주의 아이디어를 점진적으로 진전시키는 성공적인 조직 전략을 세웠다.
하이에크는 이 게임을 이해한 최초의 자유주의자였고, 몽펠르랭은 그 이해를 행동으로 옮긴 결과물이다. 그리고 그 결과가 — 앤토니 피셔의 싱크탱크 제국, 시카고 학파의 부상, 레이건-대처 혁명, 동유럽 자유화 — 20세기 후반의 정치 지형을 실제로 바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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